HOW DO YOU TASTE?

몸집 부풀리는 중입니다
이호준, 메종 마리끌레르 라이프스타일 에디터


두 달 전, 의자를 샀다. 기약없이 계속되던 재택근무를 위해 마련한 데스크 체어에서의 좌식 생활이 퍽 지겨웠기에 덜컥 결정했다. 이전부터 다이닝 테이블에 놓을 의자를 항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처음 마주한 모습에 금세 매료되고야 말았다. 선택한 의자는 네덜란드 기반의 가구 브랜드 갈바니타스 Galvanitas의 S16 모델. 네덜란드 산업디자인계의 1세대격 디자이너인 프리소 크라머르 Friso Kramer가 디자인한 체어로 금속과 목재 두 가지 소재로 제작됐다. 얼핏 학교에서 사용되는 보급형 의자를 닮아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에 세세한 디테일과 든든한 만듦새로 쌓아올린 섹시한 실루엣은 절로 미소가 지어질만한 것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블랙 덕후이기에 새까만 등 받이와 좌석, 얇고 길게 뻗은 V자형 다리를 일단 접하고 나니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콤파스 형태의 V자형 다리는 1960년대 후반 튜브식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 금속 프레스 기법으로 제작된지라 보다 뛰어난 지지력과 내구도를 자랑해 물건을 험하게 쓰는 내게 환희처럼 찾아온 안성맞춤인 아이.

혹자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뜨내기가 분수에 맞지 않는 가격대의 제품을 산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섞인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단지 저 의자 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분야 전반의 것들을 늘상 접하면서 공예가의 시간과 손을 마구 탄 화병이나 도자,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옷 등을 큰 맘 먹고 구매한 적도 여럿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엿한 자가가 있지도 않을 뿐 더러, 헉 소리가 날 만한 봉급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 특히, 에디터라는 직군에 뛰어들면서 일명 신상의 최전선에 늘상 허우적대곤 했다. 매번 마주하는 새로움의 위압감을 피부로 체감한다는 뜻이다. 자연스레 “촌스러운 건 싫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으레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질 정도. 물론, 에디터라는 직군에 뛰어들면서부터 실제로도 줄창 듣기 시작한 말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매일 마주한다하더라도 확고한 기준과 줏대가 있다면 그에 휩쓸릴 일은 없지 않나라는 의문을 표하기도 할 터.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취향이라 흔히 일컫는 것은 더 이상 완전무결한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되기에는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대변한다. 타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고 내면의 됨됨이를 따지거나 지식의 깊이를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적어도 그가 무엇을 입었으며, 무엇을 쓰는지는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취향이 나의 모든 것을 은유하는 셈이다. 곧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라는 뜻. 하물며 집에 놓인 침대 시트와 의자, 컵과 접시 하나까지도 때로는 집 주인이 하고 싶은 말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점이 되어 굵직한 선을 이룬다. 단순히 좋아하고 즐긴다는 말로만 취향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엔 취향이란 단어는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통용한다. 취향은 돈이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을 수 없는 것 또한 이러한 지점을 알게 모르게 경험해왔기 때문일지도.

오피스물로 제작된 한 드라마에서는 이미 풍파 가득한 사회생활을 겪은 고참 상사와 이제 막 커리어를 쌓아올리는 신입사원과의 관계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위해 둘이 함께 동석했던 자리에 신입은 본인이 진행한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언트에게 일명 ‘사이즈 판단’을 당한다. 볼품없이 낡은 가방, 추레한 차림새 등으로 이미 신입사원을 별 볼 일 없는 이, 자신과 급이 맞지 않은 사람으로 판단한 것. 결국 고참이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마무리 짓고 낙담하는 신입사원과 자신의 명품 가방을 바꿔 준다. “20대는 돈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무리 해서 명품을 사는지 알아요? 가진게 많을 수록 감추려 들고, 가진게 없을 수록 본인을 과시해야 하거든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가진게 없잖아요. 그럴 땐 몸집을 부풀려야 해요. 지금 사회와 투쟁할 수 없다면 타협하는 것도 필요하죠. 이런 세상이 만들어진데 가담한 것 같아 미안해요.”라는 얼핏 무심한 위로와 함께 말이다.

누구보다 질 높은 삶과 좋은 취향에 관해 논하면서 정작 그것을 향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종종 일상과 직업 간 큰 괴리감을 불러왔다. 업계 선배들이 늘상 경고해왔고 경계하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늘 좋은 것을 보지만, 그 좋은 것을 모두 누릴 순 없어. 단지 우린 그걸 전달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이 뼈아픈 것임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으레 알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왜 허리띠를 졸라매며 하나 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사모으는가라는 질문에 늘 답한다. 나는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퍽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것은 상대적이며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이는 곧 좋은 눈을 선별하는 능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 가격은 좋고 나쁨의 질적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자본주의적 지표다. 하나의 제품을 두고서 왜 비싼 것인지를 파악하며 이윽고 그것이 내게도 좋은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의 나로서는 직접 부딪혀보고 겪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이를 직업적으로도 승화할 수 있다는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기도 하다. 더 질적인 삶, 더 확고한 취향을 누군가에게 설파하는 대신 내가 먼저 그 여정을 떠나는 중인 셈이다. 무분별한 구매를 조장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비싸다라는 피상적인 지표에 천편일률적인 취향으로 본인을 매몰시키는 아둔한 선택 따윈 하고 싶지 않다. 오롯이 누릴 취향의 세계는 그저 천천히 쌓아올리기만 하는데 그쳐선 안된다. 좋은 것을 보고, 사고 즐기며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에게 부합하는 취향을 선별해 찾아가는,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길러내는 수련이 필요하다. 괜히 써본 사람이 안다는 옛말이 있겠나.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몸집을 부풀리는 중이다. 계속해서 가열차게. 훗날 구태여 내 몸집을 구태여 부풀리지 않아도, 나를 은유할 사물들이 늘상 곁에 도사릴 순간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