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LOVE MUSICAL

리지


1st CAST : 유리아(리지 보든), 여은(엠마 보든), 제이민(엘리스 러셀), 이영미(브리짓 설리번)
2nd CAST : 유리아(리지 보든), 여은(엠마 보든), 김수연(엘리스 러셀), 최현선(브리짓 설리번)
3rd CAST : 유리아(리지 보든), 김려원(엠마 보든), 제이민(엘리스 러셀), 최현선(브리짓 설리번)

작년(2021년) 12월쯤 한창 헤드윅에 빠져있었을 때, 이츠학을 연기한 여자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 함께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뮤지컬 <리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4명의 이츠학을 한 극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개막부터 티켓팅에 참전했다. 마지막까지 예매 창은 눈밭이었고 내가 엉덩이를 붙일 자리는 없었지만, 오히려 모든 배우를 만나봐야 한다는 좋은 핑계로 작품을 3번이나 관람할 수 있었다.

"리지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 아빠한텐 아니야 마흔하고 한 번 더"

<리지>는 충격적인(?) 가사의 넘버와 함께 시작된다. 동시에 이 잔인한 가사는 작품의 핵심 메시지기도 하다. 작품은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보든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미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당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리지를 중심으로 하여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그 이후의 상황까지를 각색했다. 위의 가사에서 엿볼 수 있듯, 극 내내 전개되는 충격적인 사건들은 귀를 때리는 록 사운드 덕분에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록 음악을 좋아해서일까, 걸출한 여성 배우 4명이 엄청난 에너지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인공 ‘리지 보든’을 연기하는 유리아 배우의 연기력 덕분일까. <리지>의 넘버와 장면들은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일단 극이 시작되면 모든 장면에서 눈과 귀를 거둘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하고, 몰입하는 장면은 리지가 비둘기를 잃고 슬퍼한 후에 새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기까지의 장면이다. 리지가 그의 부모님을 살인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느끼는 미칠 듯한 슬픔을 배우의 연기, 노래, 배경의 LED 화면까지 모두 활용하여 오감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던 비둘기를 죽이자 충격을 받은 리지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오열한다. 하녀 브리짓은 뒤에서 통곡하듯 노래하고, 검은 하늘에 별이 떠다니는 배경은 슬픔이라는 세상에 갇혀버린 리지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리지가 이성을 잃고, 새어머니와 아버지를 도끼로 찍어 죽이기까지 느낀 감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또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여 극의 서사를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극 내용이나 넘버와 함께 <리지>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미스터리한 등장인물 브리짓이다. 하녀인 브리짓은 보든가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관심이 없고, 단순히 돈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내가 본 브리짓은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그 누구보다 즐겼다. 게다가 은밀히 리지를 조종하며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길 유도하여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리지의 언니가 두고 간 가내 상비 독약서를 기지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보게 만들어 독살을 유도하거나, 새어머니가 혼자 있고 아버지가 쉬고 있다는 사실, 자신은 집 밖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리지에게 알리면서 살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로 할 때가 아니면 리지에게는 관심도 없는 아버지가 리지가 앨리스와 헛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비둘기와 함께한다는 사실도 브리짓이 알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브리짓은 자신을 무시하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보든가를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통쾌함과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

기존 뮤지컬에서 보기 힘든 송스루와 록 넘버의 조합. 충격적인 내용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욕설 때문에 <리지>를 처음 봤을 때는 크게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다른 극과 차별성을 갖고 <리지>를 다시 찾게 만드는 점이기도 하다. 또, 대신 소리치고 노래하면서 관객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속 시원한 기분과 함께 즐겼던 <리지>를 이렇게 마무리하며, 다시 돌아올 다음 시즌에는 마흔 번, 아니야 마흔하고 한 번 더!